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우산국 전투 (문단 편집) == 이후 == 그래도 [[신라]]의 직할령에는 [[편입]]되지 않고 존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으로 존재했던 모양이다. 신라는 [[외왕내제]]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내부의 번국 비슷한 사례는 이외에도 있다. [[당나라]]가 신라를, 망한 나라인 [[백제]]와 동격인 도독부로 만들려 하자 문무왕은 안승을 왕으로 내세워 [[보덕국]]을 번국으로 두었다. 또한 [[갈문왕]] 제도 등 신라 왕 아래에도 왕과 나라가 존재했다. 우산국뿐만 아니라 [[탐라국]]도 신라의 속국이었으며, [[견훤]] 역시 왕을 처음 자처한 이후에도 한동안은 신라의 신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57년과 1963년 두 번에 걸친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http://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288&Newsnumb=20091030|##]] 그 이전에 역사가 시작되긴 했지만 신라에 복속된 뒤 동해안 지방에서 문화가 유입된 뒤 울릉도에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 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통일신라 이후부터라고 한다. 종교는 언젠가부터 신라를 따라 [[불교]][* 그 이전까지는 토착신앙 등을 믿은 것으로 추측된다.]를 받아들인 듯. 고려 시대 김유립이 거의 빈 섬이 된 울릉도를 조사했을 때 돌로 만든 탑과 불상, 쇠로 만든 종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지리지에 있다.[* 1157년(의종 11)에 명주도감창전중내급사(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로 왕명을 받아 우릉도(羽陵島)에 사람이 살 수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였다. 돌아와 보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어 산정으로부터 동쪽으로 바다까지 1만여 보가 되고, 서쪽으로는 1만 3천여 보가 되고, 남쪽으로는 1만 5천여 보가 되며 북쪽으로는 8천여 보가 된다. 촌락의 기지(基址)가 7개소 있고, 석불·철종·석탑이 있으며, 자호(紫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있으나 암석이 많아 살 수 없다.”고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